솔직히 노엄 촘스키라는 이름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 다시 떠올린 계기는 뜻밖에도 제프리 엡스타인이었다.
최근 공개된 엡스타인 관련 문서를 다룬 기사에서 촘스키의 이름을 봤다. 유죄판결을 받은 성범죄자가 된 엡스타인과 2017년 무렵까지 연락을 주고받았고, 한 편지에서는 그를 “대단히 소중한 친구"라 불렀다고 보도됐다.
나는 기사를 봤을 뿐, 그 일을 두고 아무 판단도 하지 않는다. 사실관계도, 그 처신의 옳고 그름도 내가 단정할 자리가 아니다. 다만 뉴스를 보다 엉뚱한 데서 멈췄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애초에 왜 그렇게 유명했더라?
파고들다 보니 반세기 전의 논쟁 하나에 닿았다. 그리고 거기엔 생각의 역사가 가끔 부리는 짓궂은 반전이 숨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평생을 걸어 “언어는 결국 보상과 습관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논쟁에서 졌다. 아주 유명하게 졌다. 그런데 반세기가 지나, 우리에게 말을 거는 기계들 — 흔히 챗봇이라 부르는 것들 — 이 바로 그 보상으로 다듬어지고 있다. 진 사람의 방법이, 이긴 사람의 영토로 돌아온 것이다.
이 짧은 반전에 대한 이야기다.
개를 훈련하듯 말을 가르칠 수 있을까
주인공은 두 사람이다.
한 명은 심리학자 B. F. 스키너. 그는 사람이 말을 배우는 방식이 개가 “앉아"를 배우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봤다. 개는 앉으면 간식을 받고, 그래서 더 자주 앉는다. 아이도 “우유"라고 말해 우유를 얻으면, 그 말을 더 하게 된다. 보상이 행동을 만든다. 언어도 그렇게 훈련된 행동일 뿐이다. 머릿속에 특별한 장치 같은 건 없다. 스키너는 1957년, 이 생각을 담은 두꺼운 책을 냈다.
다른 한 명은 젊은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 그는 이게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들은 아무도 가르쳐준 적 없고 아무도 상을 준 적 없는 문장을 매일 만들어낸다. 세 살짜리가 난생처음 듣는,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문장을 태연히 말한다. 개 재주는 그렇게 안 된다. 그러니 사람의 머릿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언어를 위한 무언가가 이미 들어 있는 게 틀림없다. 촘스키는 1959년, 스키너의 책을 30쪽에 걸쳐 조목조목 부순 서평을 썼다.
그 서평은 이겼다. 학계는 스키너를 떠나 촘스키 쪽으로 넘어갔고, “인간은 언어를 위한 무언가를 갖고 태어난다"는 생각이 상식이 됐다. (사실 그 승부가 이야기만큼 깔끔한 KO는 아니었지만, 그건 잠시 접어두자.) 어쨌든 교과서에 실린 결말은 이렇다. 스키너는 틀렸고, 촘스키가 옳았다.
그리고 기계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이 흐른다.
이제 우리는 말을 하는 기계를 만든다. 어떻게 만드는지, 어려운 말 없이 딱 두 단계로 보자.
첫째, 기계에게 엄청난 양의 글을 읽힌다. 인터넷에 있는 책, 기사, 대화 거의 전부다. 기계는 그걸 읽으며 “다음에 올 단어 맞히기"를 끝없이 연습한다. 이 과정만으로 기계는 문법에 맞는 문장을 술술 만들어내게 된다.
둘째, 그 다음이 흥미롭다. 기계가 아직 거칠기 때문에, 사람이 답을 하나하나 평가한다. 좋은 답에는 “잘했다” 신호를, 나쁜 답에는 “그건 아니다” 신호를 준다. 기계는 상을 받는 쪽으로 조금씩 기운다. 더 공손하게, 더 도움이 되게, 더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 두 번째 단계에는 길고 복잡한 이름이 붙어 있지만, 벗겨보면 정확히 스키너의 아이디어다. 원하는 행동에 상을 주면 그 행동이 늘어난다. 개에게 간식을 주듯, 기계에게 칭찬을 준다.
스키너가 비웃음을 산 바로 그 방법이, 말하는 기계를 만드는 표준 공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정말 누가 이긴 걸까
여기서 반전이 한 번 더 접힌다.
기계는 그 상으로 언어를 배우는 게 아니다. 우리가 상을 주기 시작할 때, 기계는 이미 말을 할 줄 안다. 그건 산더미 같은 글을 읽어서 배운 것이지, 칭찬을 받아서가 아니다. 보상은 말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이미 말할 줄 아는 상대의 태도를 다듬을 뿐이다.
게다가 그 산더미 같은 글을 읽고 언어를 익히려면, 기계에게도 애초에 “맞는 형태의 머리"가 필요하다. 아무 구조나 되는 게 아니다. 대충 만든 기계는 글을 아무리 많이 읽혀도 언어를 제대로 못 배운다. 특정한 설계(트랜스포머)를 갖췄을 때에야 비로소 언어가 술술 들어온다.
무슨 말이냐면, 기계조차도 언어를 배우기 전에 무언가가 먼저 갖춰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촘스키가 아기에 대해 했던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언어를 위한 무언가가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점수판이 묘해진다.
촘스키가 옳았다. 언어를 배우려면 무언가가 먼저 갖춰져 있어야 하고, 상만으로는 말을 가르칠 수 없다.
스키너도 옳았다. 상은 이미 말할 줄 아는 상대를 원하는 방향으로 길들이는, 진짜로 강력한 방법이다.
말하는 기계는 이 둘을 다 쓴다. 서로를 적으로 알았던 두 사람은, 알고 보니 같은 시스템의 서로 다른 절반을 설명하고 있었다.
반세기 뒤에 온 악수
1959년의 그 논쟁을 지금 다시 읽으면, 한쪽이 다른 쪽을 때려눕힌 사건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 정답의 절반씩을 손에 쥔 채, 상대가 쥔 절반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우기던 장면에 가깝다.
그리고 그 다툼을, 스키너가 세상을 떠난 뒤 등장한 기계가 얼떨결에 매듭지었다. 양쪽 절반이 다 필요하다는 걸, 직접 보여주면서.
정작 두 당사자는 이 화해를 반기지 않았다. 스키너는 1990년에 세상을 떠나 기계를 보지 못했다. 촘스키는 살아서 봤지만 반기기는커녕, 2023년 신문 기고에서 챗봇을 “그럴듯한 다음 단어를 뱉는 굼뜬 통계 기계"라 부르며 “그건 진짜 언어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여기에 마지막 아이러니가 있다. 촘스키가 “구조도 없는 계산기"라며 손을 내저은 그 기계는, 사실 아무렇게나 만들면 언어를 못 배운다. 앞에서 봤듯 “맞는 형태의 머리"가 먼저 있어야 한다. 배우기 전에 무언가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는 것, 바로 촘스키 자신의 주장이다. 그가 폄하한 물건이 하필 그의 핵심 통찰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누가 누구를 논파했다"는 깔끔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진짜 결말은 논파가 아니라 악수다. 두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이디어가 한 기계 안에서 뜻하지 않게 나눈 악수.
더 읽을거리
- B. F. 스키너, 『언어 행동(Verbal Behavior)』(1957) — 언어를 보상과 습관으로 설명한 책.
- 노엄 촘스키, “『언어 행동』 서평”(1959) — 그 책을 무너뜨린 30쪽. 인지혁명의 신호탄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