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아들이 태어났다. 이 아이는 어떤 재능을 갖고 있을까. 그 재능은 이 아이의 인생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그런데 이 질문에는 한 겹이 더 있다. 이 아이가 어른이 될 무렵이면, 인지 노동의 대부분을 AI가 대신하는 세상이 와 있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재능이란 무엇이고, 노력은 무엇을 뜻하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오랫동안 품어온 고민을 다시 꺼내 정리하게 되었다. 재능과 노력의 관계에 대해, 그 사이에 놓인 잔인한 구조에 대해, 그리고 특이점 이후에 그 구조가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

노력의 가격

노력에는 시간이 든다. 그런데 재능이 있으면 같은 목표에 더 빨리 도달한다. 적게 들이고도 결과를 얻는 경험이 반복되면, 마음속에 기준선이 하나 생긴다. “이 정도면 충분히 노력했다.”

재능이라는 축복이 “이 정도면 됐다"는 저주로 변하는 순간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고정 마인드셋의 함정이라 부른다. 재능에 기대온 사람일수록 애쓰는 모습 자체를 “재능이 부족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으면 길을 이탈한다. 재능이 클수록 이 함정에 빠질 확률도 커진다.

왜 재능 있는 사람은 자기가 적게 투자했다는 사실을 모를까.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 같은 목표를 위해 얼마나 오래 버텨야 하는지 지켜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두 달"이 남들의 “몇 년"에 해당한다는 것을 모른 채, 그 두 달을 온전한 노력으로 기억한다.

기회주의자의 탄생

이 착각이 쌓이면 이상한 경험 데이터가 만들어진다. “나는 노력했지만 보상은 없었다.”

행동심리학의 오래된 법칙이 있다. 보상이 없으면 행동은 사라진다. 재능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충분히 투자하지 않았는데도 “투자했는데 실패했다"는 기억을 쌓는다. 그 기억이 임계치를 넘으면, 노력이라는 행위 자체가 위험한 투자로 분류된다. 실패를 배운 것이 아니라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믿음을 배운 것이다. 학습된 무력감의 변종이다.

그 결과 이들은 단기 보상만 좇는 기회주의자가 된다. 기회주의자는 파도를 기다린다. 운 좋게 파도를 잡으면 그것을 자기 전략의 결과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단기 성과에 취한 전략은 결국 큰 변동성 앞에서 무너진다.

위대함의 조건

물론 모든 재능 있는 사람이 기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갈림길은 하나다. 오래 노력한 것이 보상으로 돌아오는 경험을 해봤는가.

수학에 재능 있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학교 시험은 별다른 공부 없이 통과한다. 여기까지는 짧은 보상 주기의 세계다. 그런데 수학 올림피아드에 도전하면서 처음으로 몇 달간 풀리지 않는 문제를 만난다. 여기서 포기하면 기회주의자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그 몇 달을 버텨 문제를 풀어내면, 다른 믿음이 생긴다. “오래 버티면 결국 된다.”

이 믿음은 눈덩이처럼 굴러간다. 한 번의 성공이 다음 도전의 자신감이 되고, 그 자신감이 더 긴 호흡의 투자를 가능하게 하고, 그 투자가 다시 보상으로 돌아온다. 마태 효과다. 이 선순환 안에 있는 사람은 성공을 운에 맡기지 않는다. 지지 않는 구조를 직접 설계한다.

가장 잔인한 진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 “첫 번째 성공 경험"을 얻는 것부터가 운이다.

그 아이는 왜 몇 달을 버틸 수 있었을까. 옆에서 격려해주는 부모가 있었을지 모른다. 함께 고민하는 친구가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그저 그 시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본인의 의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조건들이다.

성실함, 노력하려는 의지조차 부모의 양육 방식과 유전적 기질과 사회적 환경이라는 운으로 결정된다. 성공한 사람들이 “내 노력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말할 때, 그 노력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 애초에 선택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편리하게 생략된다.

결국 “노력할 수 있는 힘” 자체가 일종의 재능이다. 그리고 이 재능도 다른 재능처럼 불균등하게 분배된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이유는 돈이 없어서만이 아니다. 오래 버티면 보상이 돌아온다는 확신을 심어줄 환경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실패만 배운 환경에서 노력은 위험한 도박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근성이라는 착시

여기까지 나는 버티는 힘 — 근성 — 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놓았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그 근성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오래 버티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정작 본인은 “버텼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몇 달간 안 풀리는 문제를 붙들고 있던 그 아이를 다시 보자. 그 아이는 정말 이를 악물고 견뎠을까. 어쩌면 그 문제가 그냥 좋았던 것은 아닐까. 궁금해서 놓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밖에서 근성으로 보이는 것이, 안에서는 즐거움이었을 수 있다는 얘기다. 논어의 오래된 문장이 정확히 이 지점을 가리킨다.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즐거움은 이 글이 내내 문제 삼아온 보상 주기를 우회한다. 근성이 필요한 이유는 보상 없는 구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정 자체가 보상인 사람에게는 그 구간이 아예 없다. 남들이 사막이라 부르는 길을 그는 산책한다. 취향에 맞는 영역을 찾은 사람에게 노력은 지불이 아니라 소비다.

그렇다면 근성을 기를 게 아니라 취향을 찾으면 되는 걸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즐거움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길이든 재미가 증발하는 구간이 반드시 온다. 실력이 늘지 않는 정체기, 반복 작업만 남는 마무리 단계. 즐거움만으로 달리던 사람은 여기서 멈추고, 다음 재미를 찾아 떠난다. 취향을 좇아 영원히 떠도는 딜레탕트. 기회주의자의 쾌락 버전이다.

결핍이라는 엔진

그래서 한 층 더 내려가야 한다. 즐거움이 당기는 힘이라면, 그 아래에는 미는 힘이 있다. 결핍이다.

인정받지 못한 기억.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 이런 결핍은 즐거움처럼 증발하지 않는다. 앞서 보상이 없으면 행동이 사라진다고 했지만, 결핍이 미는 행동은 이 법칙을 비껴간다. 보상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오기 때문이다.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마음의 빚이 조금씩 갚아지는 느낌 — 그것이 보상이라서,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연료가 마르지 않는다. 무명 시절 십 년을 버티는 창작자들이 대체로 낙관이 아니라 “이대로는 끝날 수 없다"는 마음으로 버티는 이유다. 위대한 작업의 상당수가 상처에서 출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앞서 “노력할 수 있는 힘 자체가 운으로 분배되는 재능"이라고 썼다. 이제 그 운의 정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 어떤 환경이 심어준 취향, 그리고 어떤 환경이 남긴 결핍. 근성은 하늘에서 떨어진 능력이 아니라, 이 두 엔진이 밖으로 드러난 증상에 가깝다. 우리가 “그릿"이라고 측정하는 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지 모른다.

물론 결핍도 만능이 아니다. 결핍은 최강의 연료지만 위험한 조향 장치다. 풀 가치가 있는 문제 대신 상처를 달래줄 것 같은 문제를 고르게 만든다. 목표에 도달해도 채워지지 않아 골대를 계속 옮기게 한다. 그 끝은 종종 번아웃이다.

그래서 위계를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결핍이 영역을 고르고, 취향이 하루하루의 루프를 굴리고, 근성은 그 둘이 침묵하는 구간을 메우는 보조 장치다. 즐거움 없는 결핍은 사람을 태워버리고, 결핍 없는 즐거움은 표류하고, 둘 다 없는 근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특이점 이후 — 규칙이 바뀐다

이제 서두에 미뤄둔 질문을 꺼낼 차례다. 아들이 살아갈 세상의 이야기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다. 재능이란 인지 능력이고, 노력이란 그 능력을 갈고닦는 데 시간을 쓰는 것이라는 전제. 그런데 AI가 특이점을 넘으면 이 전제부터 무너진다.

계산 빠른 아이가 “수학 천재"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계산기가 나온 뒤로 암산은 더 이상 재능이 아니다. AI는 이 일을 인지 능력 전반에 반복한다. 코딩, 글쓰기, 분석, 디자인. 수년의 숙련이 필요했던 모든 영역에서 AI가 평균 이상의 결과물을 즉시 만들어낸다. 인지적 재능이 상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두 사람이 같은 AI 도구를 쓸 수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이걸로 뭘 만들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 불확실한 방향으로 6개월을 밀고 나간다. 다른 사람은 이것저것 해보다가 일주일 만에 “별로네” 하고 놓는다. 두 사람의 인지 능력은 같다. 차이를 만든 것은 코딩 실력이 아니다. 앞에서 본 그 두 엔진이다.

AI 시대의 재능은 세 가지로 다시 정의된다.

질문하는 재능. 답은 AI가 낸다.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무엇이 물어볼 가치가 있는지 정하는 일은 인간에게 남는다.

편집하는 재능. AI가 쏟아내는 결과물 중 무엇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지 골라내는 심미안. 생성은 기계가 하지만 선별은 인간이 한다.

거절하는 재능. AI가 내미는 더 빠른 길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기 방향을 고집하는 힘.

셋의 공통분모는 하나다. 지루함과 불확실성을 견디는 능력. 그리고 방금 봤듯이, 이 능력의 실체는 이 악물기가 아니라 취향과 결핍이다. 과거에 지능이 계급을 결정했다면, AI 시대에는 이것이 새로운 계급 자본이 된다. 인지 노동은 AI가 대신해주지만, 목적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일은 인간의 몫으로 남기 때문이다.

노력의 모양도 바뀐다. 과거의 노력은 정해진 기술을 반복해서 숙련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피아노를 매일 네 시간 치는 것. 코드를 수천 줄 쓰며 감을 익히는 것. 길이 정해져 있으니 “이만큼 하면 이만큼 는다"는 계산이 섰다. AI 시대의 노력은 다르다. 어떤 문제가 풀 가치가 있는지 탐색하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방향을 고치는 과정이다. 길 자체가 불확실하니 보상 주기는 더 길고 더 불규칙해진다.

여기서 잔인한 역설이 생긴다. AI가 실행 비용을 0에 가깝게 낮추면 “시도"의 문턱이 사라진다. 누구나 앱을 만들고 글을 쓰고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진입이 쉬워지면 보상에 대한 기대도 빨라진다. “AI로 하루 만에 만들었는데 왜 결과가 안 나오지?” 예전에는 재능 있는 소수만 걸리던 짧은 보상 주기 중독에, 이제 모두가 걸린다. 두 달이 아니라 이틀 만에 “노력했다"고 느끼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결국 AI는 재능의 역설을 없애는 게 아니라 민주화한다. 누구나 재능 있는 사람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세상. 기회주의자는 파도를 기다리지만 거목은 뿌리를 내린다. AI 시대의 파도는 너무 잦아서, 뿌리 없는 이들은 매일 표류하게 될 것이다.

끈기의 양극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양극화에서 살아남는 쪽은 이를 악문 사람이 아니라, 견딜 필요가 없는 영역을 찾은 사람, 놓을 수 없는 이유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결국 남는 질문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노력에 대한 믿음이 운으로 결정된다면, 그 운을 설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사회의 역할일 것이다. 방향은 둘이다. 하나는 취향이 걸릴 때까지 다양한 영역에 노출될 기회. 다른 하나는 그 안에서 “해냈다"는 경험을 반복할 수 있는, 보상 주기가 견딜 만하게 설계된 성장의 사다리.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진짜 이유는 이 둘이 모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AI 시대에는 그 사다리의 모양도 바뀌어야 한다. 숙련의 사다리가 아니라, 탐색과 방향 설정의 사다리로.

아들이 자라 어떤 세상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처음에 나는 아이의 시계에 맞는 작은 성공을 설계해주는 것이 아버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도전과 그에 맞는 작은 보상들. 지금은 그 앞에 순서가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한다. 보상을 설계하기 전에, 아이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영역을 함께 찾는 일이다. 몰입해서 시계를 잊는 영역. 남들이 사막이라 부르는 길을 산책할 수 있는 영역. 결핍은 부모가 설계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취향이 걸릴 확률은 노출의 함수다. 그리고 취향이 걸린 영역 안에서라면, 성공 경험의 사다리는 훨씬 적은 비용으로 작동한다.

사실 나는 그 증거이기도 하다. 1990년, 단칸방 살림에도 아버지는 다섯 살짜리 아들에게 컴퓨터를 사주셨다. 아버지 본인은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셨다. 그런데 그 노출에 내 취향이 걸렸고, 삼십 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영역 안에서 살고 있다. 내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영역은 내가 찾아낸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놓아준 자리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기술 연대기에 따로 적어두었다.

물려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재능도 근성도 아니다. 자기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영역을 찾아본 경험, 그리고 그 안에 오래 머물러본 경험이다. 그 경험은 누군가가 함께 찾아줄 수 있다. 내가 받은 것처럼.


참고문헌

  • 캐럴 드웩, “마인드셋” (2006)
  • 앤절라 더크워스, “그릿” (2016)
  •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행운에 속지 마라” (2001)
  •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2020)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 Flow” (1990)
  • 알프레드 아들러, “인간 이해” (1927)